2024.05.24 (금)

  • 흐림속초16.1℃
  • 구름많음16.4℃
  • 흐림철원16.0℃
  • 흐림동두천15.3℃
  • 흐림파주15.1℃
  • 흐림대관령12.1℃
  • 구름많음춘천15.8℃
  • 안개백령도14.4℃
  • 비북강릉16.1℃
  • 흐림강릉17.1℃
  • 흐림동해16.7℃
  • 박무서울15.7℃
  • 박무인천15.2℃
  • 맑음원주16.1℃
  • 맑음울릉도15.1℃
  • 흐림수원14.8℃
  • 맑음영월13.2℃
  • 맑음충주13.1℃
  • 흐림서산13.5℃
  • 흐림울진16.2℃
  • 박무청주16.0℃
  • 박무대전14.7℃
  • 맑음추풍령13.6℃
  • 맑음안동14.1℃
  • 맑음상주17.2℃
  • 맑음포항17.7℃
  • 흐림군산14.4℃
  • 맑음대구17.3℃
  • 박무전주14.8℃
  • 맑음울산20.1℃
  • 맑음창원19.6℃
  • 맑음광주16.3℃
  • 맑음부산21.5℃
  • 맑음통영17.8℃
  • 박무목포16.3℃
  • 맑음여수19.0℃
  • 안개흑산도15.4℃
  • 맑음완도17.6℃
  • 흐림고창
  • 맑음순천12.8℃
  • 박무홍성(예)15.4℃
  • 흐림13.7℃
  • 맑음제주18.4℃
  • 맑음고산16.8℃
  • 구름조금성산19.8℃
  • 맑음서귀포18.2℃
  • 맑음진주14.2℃
  • 흐림강화15.2℃
  • 맑음양평15.1℃
  • 맑음이천14.4℃
  • 구름많음인제17.2℃
  • 맑음홍천14.8℃
  • 맑음태백12.9℃
  • 맑음정선군12.8℃
  • 맑음제천12.2℃
  • 맑음보은11.6℃
  • 맑음천안12.8℃
  • 흐림보령14.2℃
  • 흐림부여14.3℃
  • 맑음금산12.2℃
  • 흐림14.4℃
  • 흐림부안14.7℃
  • 맑음임실11.0℃
  • 흐림정읍14.9℃
  • 맑음남원12.9℃
  • 맑음장수10.6℃
  • 맑음고창군14.6℃
  • 흐림영광군14.1℃
  • 맑음김해시19.6℃
  • 맑음순창군12.5℃
  • 맑음북창원19.3℃
  • 맑음양산시16.4℃
  • 맑음보성군17.5℃
  • 맑음강진군
  • 맑음장흥14.7℃
  • 맑음해남14.3℃
  • 맑음고흥13.6℃
  • 맑음의령군14.5℃
  • 맑음함양군12.1℃
  • 맑음광양시17.0℃
  • 맑음진도군15.7℃
  • 맑음봉화12.2℃
  • 맑음영주13.6℃
  • 맑음문경16.0℃
  • 맑음청송군10.1℃
  • 맑음영덕16.3℃
  • 맑음의성10.9℃
  • 맑음구미16.7℃
  • 맑음영천14.5℃
  • 맑음경주시17.3℃
  • 맑음거창11.9℃
  • 맑음합천14.2℃
  • 맑음밀양16.8℃
  • 맑음산청13.5℃
  • 맑음거제17.2℃
  • 맑음남해18.4℃
  • 맑음16.0℃
기상청 제공
‘최면’에 관한 기독교적 견해는?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면’에 관한 기독교적 견해는?

크리스천 큐앤에이

Q 질문 : 기독교에서 보는 최면에 대한 관점과 그 관점에 대한 이유(근거)를 알고 싶습니다.


A 답변 : 최면이란 원래 ‘잠(hypnosis)’이라는 말에서 비롯된 헬라어로, 자신에게 최면을 건 사람의 지시를 따라 일정한 행동 혹은 말을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100년 전, 심리 분석학이 시작될 당시 프로이트와 융은 인간의 심리분석을 위해 최면을 사용하였습니다. 일반적인 상담보다 최면을 통해 이야기할 때 훨씬 저항이 없이 자신의 기억이나 삶을 진술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프로이트나 융은 최면의 한계가 분명하였기 때문에 그 방법을 버리게 됩니다.


인간의 뇌가 전능한 잠재력이 아닌 것처럼, 그것이 보여주는 최면의 잠재력 역시 제한되고 조작됩니다. 최면에서 드러나는 구체적인 내용 역시 그 개인의 환상이나 소망이나 불안의 감정들에 의해 조작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최면에서 나온 진술들을 문자적으로 믿는 것은 근거가 없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이나 신학에서 최면에 대해 말하는 것을 쉽게 찾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선명한 의식의 상태에서, 책임 있는 개인 인격의 각성 가운데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교제를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관점에서 볼 때 최면은 건전한 기독교적 신앙 실천의 중심에 들어오기 힘듭니다.


하지만 실제 최면의 양상들을 보면 다분히 종교 체험적입니다. 최면에는 영적 개방성이 있어서, 자칫 최면이 영적으로 불건전한 또 다른 영적인 존재들을 끌어들이거나 만나는 통로가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최면은 결코 성령의 통로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오직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가는 현실과 의지의 원리가 전제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에 의해 특별하게 감독받아 허용된 제한된 목적의 상황 외에, 최면에 접하는 것은 스스로 영적인 위험에빠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답변자 : 하재성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실천신학)

<‘크리스천 큐앤에이’(도서출판 등과 빛) 中 요약 발췌>

관련기사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