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23 (목)

  • 구름조금속초28.1℃
  • 맑음25.5℃
  • 맑음철원22.5℃
  • 맑음동두천21.6℃
  • 맑음파주19.0℃
  • 맑음대관령21.6℃
  • 맑음춘천25.1℃
  • 흐림백령도15.7℃
  • 맑음북강릉26.9℃
  • 맑음강릉30.0℃
  • 맑음동해27.3℃
  • 맑음서울22.5℃
  • 맑음인천18.1℃
  • 맑음원주25.4℃
  • 맑음울릉도23.1℃
  • 맑음수원20.0℃
  • 맑음영월24.5℃
  • 맑음충주25.1℃
  • 맑음서산18.1℃
  • 맑음울진24.8℃
  • 맑음청주24.7℃
  • 맑음대전25.3℃
  • 맑음추풍령25.1℃
  • 맑음안동26.5℃
  • 맑음상주26.4℃
  • 맑음포항29.9℃
  • 맑음군산17.6℃
  • 맑음대구29.1℃
  • 맑음전주21.9℃
  • 맑음울산23.0℃
  • 맑음창원24.3℃
  • 맑음광주24.0℃
  • 맑음부산21.1℃
  • 맑음통영20.7℃
  • 맑음목포20.7℃
  • 맑음여수23.1℃
  • 맑음흑산도16.0℃
  • 맑음완도24.6℃
  • 맑음고창
  • 맑음순천25.0℃
  • 맑음홍성(예)20.7℃
  • 맑음22.7℃
  • 구름많음제주21.7℃
  • 구름많음고산18.0℃
  • 구름많음성산21.7℃
  • 구름많음서귀포23.3℃
  • 맑음진주25.4℃
  • 맑음강화16.1℃
  • 맑음양평24.1℃
  • 맑음이천23.6℃
  • 맑음인제25.5℃
  • 맑음홍천25.6℃
  • 맑음태백22.4℃
  • 맑음정선군25.8℃
  • 맑음제천24.4℃
  • 맑음보은24.8℃
  • 맑음천안22.5℃
  • 맑음보령16.4℃
  • 맑음부여22.8℃
  • 맑음금산23.9℃
  • 맑음24.4℃
  • 맑음부안17.9℃
  • 맑음임실22.7℃
  • 맑음정읍22.1℃
  • 맑음남원25.0℃
  • 맑음장수22.3℃
  • 맑음고창군20.6℃
  • 맑음영광군19.2℃
  • 맑음김해시24.6℃
  • 맑음순창군24.6℃
  • 맑음북창원25.7℃
  • 맑음양산시26.0℃
  • 맑음보성군26.3℃
  • 맑음강진군25.0℃
  • 맑음장흥
  • 맑음해남0.0℃
  • 구름조금고흥25.5℃
  • 맑음의령군28.2℃
  • 맑음함양군26.8℃
  • 맑음광양시26.2℃
  • 맑음진도군20.6℃
  • 맑음봉화24.0℃
  • 맑음영주24.6℃
  • 맑음문경24.4℃
  • 맑음청송군25.8℃
  • 맑음영덕27.6℃
  • 맑음의성26.7℃
  • 맑음구미26.8℃
  • 맑음영천27.5℃
  • 맑음경주시28.8℃
  • 맑음거창23.8℃
  • 맑음합천28.4℃
  • 맑음밀양28.6℃
  • 맑음산청27.2℃
  • 맑음거제23.6℃
  • 맑음남해25.1℃
  • 맑음25.1℃
기상청 제공
‘최면’에 관 기독교적 견해는?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면’에 관한 기독교적 견해는?

크리스천 큐앤에이

Q 질문 : 기독교에서 보는 최면에 대한 관점과 그 관점에 대한 이유(근거)를 알고 싶습니다.


A 답변 : 최면이란 원래 ‘잠(hypnosis)’이라는 말에서 비롯된 헬라어로, 자신에게 최면을 건 사람의 지시를 따라 일정한 행동 혹은 말을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100년 전, 심리 분석학이 시작될 당시 프로이트와 융은 인간의 심리분석을 위해 최면을 사용하였습니다. 일반적인 상담보다 최면을 통해 이야기할 때 훨씬 저항이 없이 자신의 기억이나 삶을 진술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프로이트나 융은 최면의 한계가 분명하였기 때문에 그 방법을 버리게 됩니다.


인간의 뇌가 전능한 잠재력이 아닌 것처럼, 그것이 보여주는 최면의 잠재력 역시 제한되고 조작됩니다. 최면에서 드러나는 구체적인 내용 역시 그 개인의 환상이나 소망이나 불안의 감정들에 의해 조작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최면에서 나온 진술들을 문자적으로 믿는 것은 근거가 없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이나 신학에서 최면에 대해 말하는 것을 쉽게 찾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선명한 의식의 상태에서, 책임 있는 개인 인격의 각성 가운데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교제를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관점에서 볼 때 최면은 건전한 기독교적 신앙 실천의 중심에 들어오기 힘듭니다.


하지만 실제 최면의 양상들을 보면 다분히 종교 체험적입니다. 최면에는 영적 개방성이 있어서, 자칫 최면이 영적으로 불건전한 또 다른 영적인 존재들을 끌어들이거나 만나는 통로가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최면은 결코 성령의 통로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오직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가는 현실과 의지의 원리가 전제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에 의해 특별하게 감독받아 허용된 제한된 목적의 상황 외에, 최면에 접하는 것은 스스로 영적인 위험에빠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답변자 : 하재성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실천신학)

<‘크리스천 큐앤에이’(도서출판 등과 빛) 中 요약 발췌>

관련기사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