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30 (목)

  • 흐림속초20.0℃
  • 흐림16.8℃
  • 구름많음철원17.6℃
  • 구름많음동두천18.9℃
  • 흐림파주17.1℃
  • 흐림대관령16.0℃
  • 구름많음춘천17.7℃
  • 흐림백령도17.0℃
  • 흐림북강릉20.8℃
  • 흐림강릉21.9℃
  • 흐림동해21.5℃
  • 흐림서울20.4℃
  • 흐림인천19.6℃
  • 흐림원주18.9℃
  • 흐림울릉도20.0℃
  • 구름많음수원21.3℃
  • 흐림영월17.6℃
  • 흐림충주19.0℃
  • 흐림서산20.3℃
  • 구름많음울진23.9℃
  • 구름많음청주20.2℃
  • 흐림대전20.7℃
  • 흐림추풍령18.6℃
  • 흐림안동18.2℃
  • 흐림상주18.8℃
  • 흐림포항20.9℃
  • 흐림군산20.3℃
  • 흐림대구19.8℃
  • 흐림전주21.2℃
  • 흐림울산20.5℃
  • 흐림창원19.1℃
  • 흐림광주20.3℃
  • 흐림부산19.8℃
  • 흐림통영18.2℃
  • 구름많음목포20.7℃
  • 흐림여수19.4℃
  • 흐림흑산도18.3℃
  • 흐림완도20.0℃
  • 흐림고창20.3℃
  • 흐림순천17.3℃
  • 흐림홍성(예)21.4℃
  • 구름조금18.9℃
  • 흐림제주18.9℃
  • 흐림고산19.8℃
  • 흐림성산20.1℃
  • 구름많음서귀포20.8℃
  • 흐림진주18.0℃
  • 흐림강화19.2℃
  • 흐림양평18.1℃
  • 구름많음이천18.5℃
  • 흐림인제17.2℃
  • 흐림홍천17.0℃
  • 흐림태백19.4℃
  • 흐림정선군17.1℃
  • 흐림제천17.9℃
  • 흐림보은17.6℃
  • 구름많음천안19.2℃
  • 구름많음보령23.2℃
  • 흐림부여20.0℃
  • 흐림금산17.6℃
  • 구름많음20.4℃
  • 흐림부안20.6℃
  • 흐림임실17.5℃
  • 흐림정읍20.5℃
  • 흐림남원18.3℃
  • 흐림장수16.2℃
  • 흐림고창군21.2℃
  • 흐림영광군21.0℃
  • 흐림김해시18.2℃
  • 흐림순창군19.3℃
  • 흐림북창원19.8℃
  • 흐림양산시20.1℃
  • 흐림보성군19.8℃
  • 흐림강진군20.1℃
  • 흐림장흥19.5℃
  • 흐림해남20.6℃
  • 흐림고흥20.2℃
  • 흐림의령군17.7℃
  • 흐림함양군17.3℃
  • 흐림광양시19.0℃
  • 흐림진도군19.7℃
  • 흐림봉화17.6℃
  • 흐림영주17.8℃
  • 흐림문경18.2℃
  • 흐림청송군16.0℃
  • 흐림영덕21.2℃
  • 흐림의성17.8℃
  • 흐림구미19.7℃
  • 흐림영천18.0℃
  • 흐림경주시20.1℃
  • 흐림거창16.1℃
  • 흐림합천17.6℃
  • 흐림밀양18.6℃
  • 흐림산청17.0℃
  • 흐림거제18.2℃
  • 흐림남해19.2℃
  • 흐림19.2℃
기상청 제공
‘최면’에 관한 기독교적 견해는?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면’에 관한 기독교적 견해는?

크리스천 큐앤에이

Q 질문 : 기독교에서 보는 최면에 대한 관점과 그 관점에 대한 이유(근거)를 알고 싶습니다.


A 답변 : 최면이란 원래 ‘잠(hypnosis)’이라는 말에서 비롯된 헬라어로, 자신에게 최면을 건 사람의 지시를 따라 일정한 행동 혹은 말을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100년 전, 심리 분석학이 시작될 당시 프로이트와 융은 인간의 심리분석을 위해 최면을 사용하였습니다. 일반적인 상담보다 최면을 통해 이야기할 때 훨씬 저항이 없이 자신의 기억이나 삶을 진술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프로이트나 융은 최면의 한계가 분명하였기 때문에 그 방법을 버리게 됩니다.


인간의 뇌가 전능한 잠재력이 아닌 것처럼, 그것이 보여주는 최면의 잠재력 역시 제한되고 조작됩니다. 최면에서 드러나는 구체적인 내용 역시 그 개인의 환상이나 소망이나 불안의 감정들에 의해 조작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최면에서 나온 진술들을 문자적으로 믿는 것은 근거가 없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이나 신학에서 최면에 대해 말하는 것을 쉽게 찾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선명한 의식의 상태에서, 책임 있는 개인 인격의 각성 가운데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교제를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관점에서 볼 때 최면은 건전한 기독교적 신앙 실천의 중심에 들어오기 힘듭니다.


하지만 실제 최면의 양상들을 보면 다분히 종교 체험적입니다. 최면에는 영적 개방성이 있어서, 자칫 최면이 영적으로 불건전한 또 다른 영적인 존재들을 끌어들이거나 만나는 통로가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최면은 결코 성령의 통로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오직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가는 현실과 의지의 원리가 전제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에 의해 특별하게 감독받아 허용된 제한된 목적의 상황 외에, 최면에 접하는 것은 스스로 영적인 위험에빠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답변자 : 하재성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실천신학)

<‘크리스천 큐앤에이’(도서출판 등과 빛) 中 요약 발췌>

관련기사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