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8 (토)

  • 맑음속초23.1℃
  • 맑음26.1℃
  • 맑음철원23.4℃
  • 맑음동두천23.4℃
  • 맑음파주22.0℃
  • 맑음대관령21.8℃
  • 맑음춘천25.7℃
  • 구름많음백령도16.4℃
  • 맑음북강릉28.4℃
  • 맑음강릉29.9℃
  • 맑음동해30.3℃
  • 맑음서울23.6℃
  • 맑음인천21.5℃
  • 맑음원주25.7℃
  • 맑음울릉도21.2℃
  • 맑음수원23.0℃
  • 맑음영월25.1℃
  • 맑음충주26.2℃
  • 맑음서산22.8℃
  • 맑음울진28.8℃
  • 맑음청주27.2℃
  • 맑음대전26.4℃
  • 맑음추풍령25.7℃
  • 맑음안동26.8℃
  • 맑음상주27.2℃
  • 맑음포항29.1℃
  • 맑음군산22.2℃
  • 맑음대구29.0℃
  • 맑음전주24.1℃
  • 맑음울산25.9℃
  • 맑음창원24.5℃
  • 맑음광주26.5℃
  • 맑음부산21.8℃
  • 맑음통영21.9℃
  • 맑음목포24.0℃
  • 맑음여수22.2℃
  • 맑음흑산도19.2℃
  • 맑음완도23.7℃
  • 맑음고창
  • 맑음순천23.1℃
  • 맑음홍성(예)22.9℃
  • 맑음25.0℃
  • 맑음제주22.8℃
  • 맑음고산21.7℃
  • 맑음성산20.8℃
  • 맑음서귀포23.2℃
  • 맑음진주24.0℃
  • 맑음강화20.3℃
  • 맑음양평25.2℃
  • 맑음이천25.7℃
  • 맑음인제24.9℃
  • 맑음홍천25.9℃
  • 맑음태백22.8℃
  • 맑음정선군26.7℃
  • 맑음제천24.9℃
  • 맑음보은25.6℃
  • 맑음천안24.9℃
  • 맑음보령21.1℃
  • 맑음부여23.9℃
  • 맑음금산25.7℃
  • 맑음26.7℃
  • 맑음부안22.3℃
  • 맑음임실26.5℃
  • 맑음정읍24.5℃
  • 맑음남원27.5℃
  • 맑음장수24.7℃
  • 맑음고창군24.7℃
  • 맑음영광군24.8℃
  • 맑음김해시24.6℃
  • 맑음순창군27.0℃
  • 맑음북창원25.3℃
  • 맑음양산시25.1℃
  • 맑음보성군23.4℃
  • 맑음강진군23.7℃
  • 맑음장흥22.5℃
  • 맑음해남23.3℃
  • 맑음고흥24.4℃
  • 맑음의령군26.1℃
  • 맑음함양군28.7℃
  • 맑음광양시24.3℃
  • 맑음진도군21.9℃
  • 맑음봉화24.6℃
  • 맑음영주25.3℃
  • 맑음문경25.8℃
  • 맑음청송군26.4℃
  • 맑음영덕27.1℃
  • 맑음의성27.4℃
  • 맑음구미26.8℃
  • 맑음영천27.2℃
  • 맑음경주시28.2℃
  • 맑음거창26.6℃
  • 맑음합천26.3℃
  • 맑음밀양26.3℃
  • 맑음산청25.2℃
  • 맑음거제22.3℃
  • 맑음남해23.7℃
  • 맑음24.6℃
기상청 제공
‘최면’에 관한 기독교적 견해는?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면’에 관한 기독교적 견해는?

크리스천 큐앤에이

Q 질문 : 기독교에서 보는 최면에 대한 관점과 그 관점에 대한 이유(근거)를 알고 싶습니다.


A 답변 : 최면이란 원래 ‘잠(hypnosis)’이라는 말에서 비롯된 헬라어로, 자신에게 최면을 건 사람의 지시를 따라 일정한 행동 혹은 말을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100년 전, 심리 분석학이 시작될 당시 프로이트와 융은 인간의 심리분석을 위해 최면을 사용하였습니다. 일반적인 상담보다 최면을 통해 이야기할 때 훨씬 저항이 없이 자신의 기억이나 삶을 진술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프로이트나 융은 최면의 한계가 분명하였기 때문에 그 방법을 버리게 됩니다.


인간의 뇌가 전능한 잠재력이 아닌 것처럼, 그것이 보여주는 최면의 잠재력 역시 제한되고 조작됩니다. 최면에서 드러나는 구체적인 내용 역시 그 개인의 환상이나 소망이나 불안의 감정들에 의해 조작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최면에서 나온 진술들을 문자적으로 믿는 것은 근거가 없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이나 신학에서 최면에 대해 말하는 것을 쉽게 찾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선명한 의식의 상태에서, 책임 있는 개인 인격의 각성 가운데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교제를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관점에서 볼 때 최면은 건전한 기독교적 신앙 실천의 중심에 들어오기 힘듭니다.


하지만 실제 최면의 양상들을 보면 다분히 종교 체험적입니다. 최면에는 영적 개방성이 있어서, 자칫 최면이 영적으로 불건전한 또 다른 영적인 존재들을 끌어들이거나 만나는 통로가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최면은 결코 성령의 통로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오직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가는 현실과 의지의 원리가 전제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에 의해 특별하게 감독받아 허용된 제한된 목적의 상황 외에, 최면에 접하는 것은 스스로 영적인 위험에빠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답변자 : 하재성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실천신학)

<‘크리스천 큐앤에이’(도서출판 등과 빛) 中 요약 발췌>

관련기사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