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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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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3)

한국기독역사의 발자취(7)
김승학 목사의 논문 연재(7) - 임학수 목사(3)

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3)

 

김승학목사(서재).jpg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임학수 목사.jpg

임학수 목사
(林鶴洙, 1884-1969)

 

 

목차

서론

1. 임학수, 믿음의 조상이 되다

2. 예수 믿기로 결단하다

3. 고향 매정에 교회를 설립하다

4. 권찬영 선교사의 서기가 되다

5. 목사로 임직(任職)하다

6. 주일학교에 비상한 관심을 갖다

7. 한국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다

8.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하다

9. 지역의 복음화에 앞장서다

10. 사경회에 온 힘을 쏟다

 


 

7. 한국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다

 

임학수 목사가 시무할 때 안동교회는 공식적으로 신학교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함으로써 신학생을 키우는 일에 협력하는 사역을 시작하게 된다. 이 장학금은 안동교회가 지출한 최초의 장학금이다.

 

임학수 목사가 안동교회에 시무하던 기간에 교회에서 중심 역할을 하던 권중한·박두영 두 장로와 권중한 장로의 아들 권태희가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고 졸업하게 되어 권중한 장로는 1934년에, 박두영과 권태희는 1936년에 각각 목사로 임직받았다. 그리하여 1936년 2월 안동교회가 박두영과 권태희에게 장학금으로 후원했던 것이다. 임학수 목사는 당시 정규 신학교를 졸업한 교역자가 부족한 시절에 안동교회 출신 3명을 후원하여 목사를 양성하여 배출시켰다.

 

더욱이 안동교회 80년사는 권찬영 선교사가 개인적으로 미국 후원자의 도움으로 권태희를 목사로 육성하고, 그의 형인 권태호를 일본에 유학시켜 성악가로 키웠음을 기록하고 있다. 신학생을 후원함으로써 한국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는 일에 임학수 목사와 권찬영 선교사가 뜻을 모아 함께 힘썼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938년 제33회 경안노회에서 권중한 목사는 노회장으로 피선되었고, 박두영 목사는 후에 경동노회로 이명했으며, 권태희 목사는 임직과 동시에 동부교회 제3대 담임목사로 시무하다가 대구로 가서 이후의 사역을 감당했다.

 

8.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하다

 
유능한 한학자에서 예수쟁이로 변한 임학수의 사고는 자유로웠다. 사실 한학을 공부한 사람은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특히 그는 기독청년면려회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는데, 예배 이외의 행사도 예배당에서 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1921년 청년면려회가 시작된 이후 안동교회는 적극적으로 청년들의 사역을 도왔다. 1925년 2월 17일 예배시간에 청년면려회가 주최한 “현세에 유행하는 이혼의 폐습이 남자에게 있느냐 여자에게 있느냐”는 주제의 토론회를 허락했다. 특히 임학수 목사가 시무할 때인 1929년 청년면려회가 금주·금연 강연을 위해 안동교회 예배당을 사용하게 허락해 달라는 장소청원을 허락했다. 본 예배당을 순수 예배가 아닌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도록 허락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90여 년 전, 안동교회는 예배만을 위한 목적이 아니더라도 성도들에게 유익이 되는 토론회나 세미나, 행사라면 언제든지 예배당의 문을 열 정도로 열린 교회요, 당시 담임인 임학수 목사도 열린 목회자였다.

 

자료 사진.jpg

1938년 결혼식 주례 후 안동교회 예배당 앞에서 기념 촬영.(뒷줄 중앙 임학수 목사)

 

또한, 안동교회는 교회예식을 준수하며 결혼예식을 한다면 언제든지 예배당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오늘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주(主) 예배실이 교회의 특정한 기관이나 행사를 위해 사용되기도 하지만 지금부터 90~100년 전의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성경과 교회 규칙에서 어긋나지 않도록 합당하게 적용하여 처리한 목회자가 바로 임학수 목사이다. 임학수 목사는 성경과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유연하게 사역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목회자였던 것이다. 

 

9. 지역의 복음화에 앞장서다

 

임학수 목사의 부임은 온 교회가 합력하여 환경에 맞는 새로운 전도를 시도하게 했다. 안동교회 제225회 당회록은 “오늘 저녁부터 6일 저녁까지 예배당에서 환등사진 전도를 하기로 가결하다”고 기록한다. 선교사의 도움을 받은 환등사진을 통한 전도는 당시로 보면 혁신적인 전도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환등사진 전도는 불신자들을 교회로 초청하여 예배당에서 환등사진을 보여주며 전도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영화, 사진 등 영상을 통해 전도하는 방식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임학수 목사는 문명의 이기에 배타적이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효율적인 도구로 사용할 줄 아는 지혜로운 목회자였다.

 

또한, 임학수 목사는 체계적으로 전도대를 조직하여 노방전도에 최선을 다했다. 1929년 3월 4일 제직회의록에 따르면 부활주일을 전후에 마을마다 가가호호 방문하여 전도지를 배부하기로 결의했다. 이것은 임학수 목사가 이전과는 다른 보다 과학적이고 치밀한 전도계획을 세워 지역의 복음화를 추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931년 7월 6일 제직회는 안동을 방문하는 평양 숭실전문학교 학생들의 전도활동을 돕기로 하고 이들을 맞이할 위원까지 구성했다. 당시 숭실전문대학교 학생들로 조직된 전도대는 안동교회가 매진하고 있던 전도에 큰 힘을 보탤 수 있었을 것이다. 이외에도 1935년 4월 8일의 제직회의록은 계명학교에 나오는 학생 중에 예수를 믿지 않는 학생의 가정을 방문해 복음을 전하도록 의논했다. 이 전도방법 역시 오늘의 맞춤 전도와 흡사한 방식으로 타겟(Target)을 정해 집중적으로 전도하여 높은 결신율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임학수 목사는 수하리 교회에 신실한 믿음을 가진 서무선 집사를 권찰로 임명하고, 주일학교의 헌신자로 권돌석을 파송해서 수하 지역이 부흥되어 기도처에서 벗어나 비로소 교회가 되게 했다. 그 교회가 수하교회(오늘날의 수상교회)이다. 또한, 안동교회가 세운 삼마골 기도실(오늘의 이하교회)에 김성진, 전계원을 집사로 임명해 보내기도 했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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