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3 (금)

  • 맑음속초17.0℃
  • 맑음21.1℃
  • 맑음철원20.9℃
  • 맑음동두천21.6℃
  • 맑음파주17.6℃
  • 맑음대관령15.0℃
  • 맑음춘천22.2℃
  • 맑음백령도14.1℃
  • 맑음북강릉16.9℃
  • 맑음강릉20.3℃
  • 맑음동해15.8℃
  • 맑음서울20.6℃
  • 맑음인천17.4℃
  • 맑음원주21.6℃
  • 맑음울릉도16.8℃
  • 맑음수원18.0℃
  • 맑음영월19.4℃
  • 맑음충주19.9℃
  • 맑음서산17.3℃
  • 맑음울진15.9℃
  • 맑음청주22.7℃
  • 맑음대전21.5℃
  • 맑음추풍령17.8℃
  • 맑음안동22.2℃
  • 맑음상주19.1℃
  • 맑음포항20.4℃
  • 맑음군산16.3℃
  • 맑음대구22.9℃
  • 맑음전주19.1℃
  • 맑음울산15.3℃
  • 맑음창원16.4℃
  • 맑음광주20.7℃
  • 맑음부산16.7℃
  • 맑음통영16.6℃
  • 맑음목포16.1℃
  • 맑음여수17.4℃
  • 맑음흑산도13.3℃
  • 맑음완도16.8℃
  • 맑음고창14.8℃
  • 맑음순천16.3℃
  • 맑음홍성(예)18.3℃
  • 맑음19.5℃
  • 맑음제주17.4℃
  • 맑음고산15.8℃
  • 맑음성산15.2℃
  • 맑음서귀포16.8℃
  • 맑음진주17.9℃
  • 맑음강화15.6℃
  • 맑음양평20.7℃
  • 맑음이천21.2℃
  • 맑음인제18.5℃
  • 맑음홍천20.9℃
  • 맑음태백15.7℃
  • 맑음정선군18.7℃
  • 맑음제천18.0℃
  • 맑음보은18.5℃
  • 맑음천안19.6℃
  • 맑음보령14.7℃
  • 맑음부여18.9℃
  • 맑음금산20.2℃
  • 맑음20.9℃
  • 맑음부안15.9℃
  • 맑음임실17.7℃
  • 맑음정읍16.9℃
  • 맑음남원21.0℃
  • 맑음장수16.5℃
  • 맑음고창군15.1℃
  • 맑음영광군15.1℃
  • 맑음김해시17.3℃
  • 맑음순창군19.0℃
  • 맑음북창원18.4℃
  • 맑음양산시17.4℃
  • 맑음보성군15.7℃
  • 맑음강진군17.4℃
  • 맑음장흥16.7℃
  • 맑음해남16.0℃
  • 맑음고흥14.8℃
  • 맑음의령군18.9℃
  • 맑음함양군18.2℃
  • 맑음광양시17.9℃
  • 맑음진도군15.2℃
  • 맑음봉화16.6℃
  • 맑음영주18.0℃
  • 맑음문경17.6℃
  • 맑음청송군14.9℃
  • 맑음영덕14.7℃
  • 맑음의성18.6℃
  • 맑음구미18.4℃
  • 맑음영천19.6℃
  • 맑음경주시17.1℃
  • 맑음거창16.4℃
  • 맑음합천21.2℃
  • 맑음밀양20.1℃
  • 맑음산청19.2℃
  • 맑음거제14.8℃
  • 맑음남해15.8℃
  • 맑음17.0℃
기상청 제공
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7)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7)

한국기독역사의 발자취(7)
김승학 목사의 논문 연재(7) - 임학수 목사(7)

일평생 경안노회를 떠나지 않은 주의 종(從), 임학수 목사(7)

 

김승학목사(서재).jpg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임학수 목사.jpg

임학수 목사

 (林鶴洙, 1884-1969)

 

 

18. 최고의 한학자(漢學者)가 되다

 

임학수는 예천군 보문면에 위치한 옥천서원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손녀 임순오 권사는 “할아버지가 1905년 궁내부 주사시험에 급제하여 관료가 되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궁내부 주사는 6품 벼슬이고, 궁내부는 1894년 제1차 갑오개혁 때 신설되어 왕실에 관한 일을 총괄 맡은 관청으로 고종이 근대화와 관련된 사무를 궁내부에 배치시켜 자신이 직접 통제했다. 임학수는 한학을 전공하고 한학에 능한 선비였다. 그런데 임학수는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예수의 제자로 변화되었다. 그는 궁내부 주사의 길을 버리고 십자가의 길을 걸었다.

 

임학수 목사는 권찬영 선교사의 서기, 조사를 거쳐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일평생 목사의 길을 걸었다. 그는 한문 성경을 늘 지니고 있었으며, 한문을 사용한 한시(漢詩)로 설교했다. 특히 주일 설교 중에 한시를 자주 인용하여 교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다. 임학수 목사는 역사의식을 남기고 간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한시를 조건 없이 써주었고, 특히 상()을 당한 성도에게 한시로 만장을 써서 상가를 위로했다고 한다. 임학수는 한학을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한학을 예수보다 우선하지 않았다. 다만 한학을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였다.

 

193746, 안동교회는 역사에 남을 2층 석조 예배당을 준공했다. 그때 임학수 목사가 쓴 한시(漢詩)법상동 예배당 건축기(法尙洞禮拜堂建築記)’1940424일 자 장로회보에 실리기도 했다.

 

배흥직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임학수 목사는 은퇴 후에도 시간이 나면 한문 공부와 한시를 공부했다고 한다. 손녀 임순오 권사도 조부 임학수 목사 방안에는 한문책이 가득했다고 말 한 적이 있다. 또한, 임학수 목사는 생신날에는 지역의 한학자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점심을 대접하고 식후에는 한시경연대회를 열었다고 한다. 임학수 목사는 비록 평생 목회를 했지만, 한학을 완전히 잊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임학수 목사가 남겨 놓은 또 하나의 유명한 한시가 있다. 그것은 은퇴 이후인 1950년대, 이승만 대통령 시절 개최된 전국 한시 백일장 대회에서 최우수작으로 당선된 시이다. 이 백일장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친히 평화통일이라는 시제(詩題)를 주었고, 임학수 목사가 쓴 한시가 참가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선정됨으로써 전국적으로 유명한 한시 작가가 되었다.

 

또한, 임학수 목사는 경안노회 경내의 기관이나 교회 이름을 작명(作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안학원, 경안성서학원, 영주의 영광학원, 도원교회 등은 성경과 한문을 결합한 그의 작품으로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들이다. 임학수 목사는 한학자였지만 목회의 길로 들어선 후에는 한학의 길을 걷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장점인 한학을 목회 현장에 도입함으로써 성도들을 위로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든든히 세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목회의 도구로 사용하였다.

 

기독역사 한시.jpg

1950년대, 이승만 대통령 시절 개최된 전국 한시 백일장 대회에서 최우수작으로 당선된 임학수 목사의 한시. 임학수 목사는 이 시에서 한반도의 허리가 잘린 것을 통탄하고 있다. 모든 것이 옛날과 똑 같은데, 한반도만이 분단되었음을 슬퍼하고 있다. 이 시에서 임학수 목사가 분단된 조국의 평화통일을 정말 그리워했던 지도자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19. 은퇴 후에도 목회를 계속하다

 

19291월부터 19393월까지 11년 동안 안동교회의 담임으로 섬기다가 사임한 임학수 목사는 영양읍교회, 풍기교회, 창락교회, 풍기 성내교회, 예천읍교회, 예천교회, 예천 상락교회 등 지역의 모 교회, 중심 교회를 섬겼다. 그 후 임학수 목사는 195212, 고향 땅인 안동으로 돌아왔다. 고향을 떠난 지 14년 만이었다.

 

당시에는 목사의 시무연령 제한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학수 목사는 예천교회를 끝으로 69세에 현직에서 은퇴하고, 교역자가 시무하지 않는 작은 교회를 위해 남은 인생을 드리기 시작했다. 그에게 있어서 목회는 천직(天職)이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힘이 남아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아야 할 사명감에 불타 있었던 것이다.

 

안동으로 귀향한 임학수 목사는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다. 6·25 전쟁이 끝난 후 안동에는 예배당이 무너지고 담임목사가 없는 교회들이 많이 있었다. 그는 담임교역자가 없는 용상교회, 문수교회, 태화교회 등을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임학수 목사는 용상교회는 195212월부터 195312월까지, 문수교회는 1954년부터 19555월까지, 그리고 태화교회는 19556월부터 1962년까지 섬기는 투혼을 발휘했다. 특히 그가 마지막으로 섬긴 교회는 태화교회(지금의 도원교회), 그는 72세부터 시작하여 79세까지 마지막까지 목회의 끈을 놓지 않았다.

 

사실 그는 지역의 중심 교회만 섬긴 것은 아니다. 192517일 개회된 제7회 경안노회에서 목사 임직을 받은 이후 1926년에는 하회교회를, 1927년에는 노회 허락을 받아 옹천·지곡·연당·매정·안흥·녹내·방하 등 7처 교회에서 시무했다. 그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교회라면 교인 수의 다소를 생각하지 않고 교회를 돌보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했다. 그 결과 임 목사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역의 장()을 어떤 경우에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 섬겼던 것이다.

 

임학수 목사는 예수님을 영접한 1909년 이후 1962년까지 50여 년 동안 경안노회를 단 한 번도 떠나지 않은 주의 종이다. 동시에 목회자가 없는 작은 교회에서 끝까지 투혼을 발휘하며 평생을 다해 양들을 돌보는 사역에 마지막까지 헌신한 신실한 주의 종임에 틀림이 없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관련기사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