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금)

  • 구름많음속초24.1℃
  • 구름많음23.6℃
  • 구름많음철원24.0℃
  • 구름조금동두천25.0℃
  • 구름조금파주23.3℃
  • 구름조금대관령24.0℃
  • 구름많음춘천24.3℃
  • 맑음백령도16.1℃
  • 구름많음북강릉23.1℃
  • 구름조금강릉25.2℃
  • 구름많음동해22.9℃
  • 구름조금서울24.8℃
  • 연무인천21.6℃
  • 구름조금원주24.6℃
  • 흐림울릉도19.9℃
  • 구름많음수원24.1℃
  • 구름많음영월24.8℃
  • 구름많음충주24.3℃
  • 구름많음서산23.9℃
  • 구름많음울진19.7℃
  • 구름많음청주26.3℃
  • 구름많음대전26.1℃
  • 흐림추풍령24.7℃
  • 구름많음안동24.4℃
  • 흐림상주24.7℃
  • 흐림포항23.9℃
  • 구름많음군산22.5℃
  • 흐림대구24.7℃
  • 흐림전주25.2℃
  • 흐림울산20.7℃
  • 흐림창원21.1℃
  • 구름많음광주23.3℃
  • 흐림부산17.9℃
  • 흐림통영18.9℃
  • 구름많음목포20.2℃
  • 흐림여수19.4℃
  • 구름많음흑산도18.7℃
  • 흐림완도21.0℃
  • 구름많음고창22.8℃
  • 구름많음순천21.7℃
  • 흐림홍성(예)24.0℃
  • 구름조금24.5℃
  • 흐림제주17.8℃
  • 흐림고산18.0℃
  • 흐림성산18.9℃
  • 구름많음서귀포20.0℃
  • 흐림진주21.5℃
  • 구름조금강화21.7℃
  • 구름많음양평24.2℃
  • 구름많음이천23.9℃
  • 구름많음인제25.2℃
  • 구름많음홍천24.8℃
  • 흐림태백25.1℃
  • 구름많음정선군27.3℃
  • 구름많음제천24.0℃
  • 구름많음보은24.7℃
  • 구름많음천안25.5℃
  • 구름많음보령21.8℃
  • 구름많음부여25.8℃
  • 흐림금산25.1℃
  • 구름많음24.8℃
  • 구름많음부안23.1℃
  • 흐림임실22.5℃
  • 흐림정읍24.2℃
  • 구름많음남원23.3℃
  • 흐림장수21.2℃
  • 구름많음고창군23.4℃
  • 흐림영광군21.5℃
  • 구름많음김해시21.4℃
  • 구름많음순창군23.3℃
  • 구름많음북창원23.4℃
  • 흐림양산시22.0℃
  • 흐림보성군20.4℃
  • 흐림강진군22.1℃
  • 흐림장흥22.1℃
  • 흐림해남21.3℃
  • 흐림고흥21.1℃
  • 구름많음의령군23.2℃
  • 흐림함양군23.1℃
  • 흐림광양시22.3℃
  • 흐림진도군19.7℃
  • 구름많음봉화23.0℃
  • 구름많음영주23.2℃
  • 구름많음문경24.3℃
  • 구름많음청송군25.3℃
  • 구름많음영덕24.4℃
  • 구름많음의성25.4℃
  • 흐림구미24.4℃
  • 흐림영천23.4℃
  • 흐림경주시24.1℃
  • 흐림거창22.1℃
  • 흐림합천23.3℃
  • 구름많음밀양22.5℃
  • 흐림산청21.4℃
  • 흐림거제20.6℃
  • 흐림남해20.1℃
  • 흐림21.6℃
기상청 제공
나의 출애굽기(20)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의 출애굽기(20)

북한선교현장

나의 출애굽기(20)

 

드보라

 

  

51. 동생의 노력으로 집결소에서 출소하게 되다

 

드디어 그렇게 기다리던 동생이 집결소에 면회를 왔다. 동생은 내가 탈북하기 전에 군대에 갔던지라 이번 만남이 거진 10년 만이었다. 동생은 나를 만나자마자 욕을 한 사발 했다. “당과 수령을 배반하고 부모·형제를 배반했으면 잘 살아야지 이게 무슨 꼴이냐!” “동생아! 미안하다 미안하다

 

나는 동생 볼 면목이 없어서 그저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 모습을 보던 간부는 민망했던지 , 그만 욕해라 안 그래도 불쌍한데 뭐 그리 심하게 대하냐?” 하면서 말리다가 자리를 피했다. 그 사람이 자리를 피하자 동생은 그제야 울면서 ! 누나가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있는 것만 해도 감사하다라고 했다. 간수들에게 혹시 잘못 보일까 봐 반가운 마음을 억누르고 그렇게 욕을 했던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 어떻게 살았는지 이야기를 나눴다. 동생은 결혼하고 가정을 잘 꾸리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나올 수 있겠는지 애써보겠다고 했다. 그 뒤로도 동생은 자주 면회를 왔고 여기저기 돈도 빌려서 나를 위해 뒷공작을 해주었다. 나의 출소를 위한 노력이 결실을 볼 즈음 동생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누나, 내가 꺼내줄 수 있는데 꺼내주면 중국 갈 거지?” ”아냐, 난 안 간다두 번 다시 이런 일 없다.” “약속한 거지? 알았어, 그러면 누나를 꺼내줄게.” 나는 동생을 만난 지 2달 만에 출소할 수 있었다.

 

52. 북한 땅에 정착을 하지 못하고, 다시 탈북을 시도하다.

 

동생과 약속한 대로 어떻게 해서든 북에서 살아보려고 마음을 굳게 먹고 나왔다. 그런데 나와 보니 하루도 못 살 것 같았다. 중국에서는 비록 잘 살지는 못해도 하고 싶은 말은 마음대로 했는데 여기는 말도 맘대로 못하고 통행증 없으면 어디 가지도 못했다. 숨 막히는 답답함이 나를 짓눌러왔다. 이전에는 어떻게 지냈는지 모를 정도로 북한은 말 그대로 감옥 그 자체였다. 온 사방의 감시가 느껴졌다. 숨이 막혔다.

    

나는 언니도 찾고 북에 두고 나갔던 아들딸도 찾아야 했다. 그러나 돈은 1원도 없고 이동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사람을 찾아 중국 가면 돈을 보내겠으니 내 아들딸 좀 찾아주오.” 하고 주소를 쥐여주고 부탁을 했다. 그런데 돌아온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시어머니와 큰아버지 모두 다 죽었고 우리 아이들은 찾지 못했고, 꽃제비가 되었다는 소식만 들었다고 했다. 가슴이 무너지고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북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진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중국에 놓고 온 갓난아이 생각이 간절했다.

 

며칠 이렇게 마음을 잡지 못하다가 결심을 했다. 무작정 강을 건너기로 한 것이다. 그 전에 장마당 가서 쥐약을 사 왔다. 혹시 붙잡히면 다시 감옥생활은 도저히 할 수 없겠다 싶어서 잡히면 먹고 죽을 생각으로 사 온 것이다. 그렇게 각오를 하고 강을 건너러 갔다. 깊은 밤, 손에 쥐약을 쥐고 강가에 서서 할머니에게 배운 대로 문구를 외우고 기도 아닌 기도를 했다.

 

하나님, 건너게 해주시면 죽을 때까지 하나님께 충성하겠습니다.”

   

(한국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관련기사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