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토)

  • 맑음속초15.8℃
  • 맑음8.7℃
  • 맑음철원7.4℃
  • 맑음동두천7.6℃
  • 맑음파주6.1℃
  • 맑음대관령6.0℃
  • 맑음춘천8.6℃
  • 맑음백령도10.1℃
  • 맑음북강릉16.4℃
  • 맑음강릉18.7℃
  • 맑음동해16.3℃
  • 맑음서울11.6℃
  • 박무인천11.0℃
  • 맑음원주11.2℃
  • 맑음울릉도16.9℃
  • 박무수원8.7℃
  • 맑음영월8.2℃
  • 맑음충주9.1℃
  • 맑음서산7.5℃
  • 맑음울진12.5℃
  • 박무청주12.7℃
  • 맑음대전10.7℃
  • 맑음추풍령10.3℃
  • 맑음안동10.5℃
  • 맑음상주12.3℃
  • 맑음포항15.3℃
  • 맑음군산9.0℃
  • 맑음대구12.1℃
  • 맑음전주10.7℃
  • 박무울산12.0℃
  • 맑음창원12.8℃
  • 맑음광주12.2℃
  • 맑음부산13.8℃
  • 맑음통영11.7℃
  • 맑음목포12.2℃
  • 맑음여수13.0℃
  • 맑음흑산도12.1℃
  • 맑음완도11.8℃
  • 맑음고창7.7℃
  • 맑음순천7.9℃
  • 박무홍성(예)7.9℃
  • 맑음8.8℃
  • 구름조금제주15.8℃
  • 구름많음고산15.3℃
  • 구름많음성산15.3℃
  • 구름많음서귀포17.3℃
  • 흐림진주12.0℃
  • 맑음강화7.1℃
  • 맑음양평9.6℃
  • 맑음이천9.3℃
  • 맑음인제8.7℃
  • 맑음홍천8.5℃
  • 맑음태백7.0℃
  • 맑음정선군6.0℃
  • 맑음제천7.1℃
  • 맑음보은9.0℃
  • 맑음천안8.6℃
  • 맑음보령8.3℃
  • 맑음부여7.9℃
  • 맑음금산7.8℃
  • 맑음10.2℃
  • 맑음부안8.4℃
  • 맑음임실7.4℃
  • 맑음정읍8.7℃
  • 맑음남원9.3℃
  • 맑음장수7.0℃
  • 맑음고창군8.0℃
  • 맑음영광군8.1℃
  • 맑음김해시12.5℃
  • 맑음순창군8.9℃
  • 맑음북창원13.0℃
  • 맑음양산시12.0℃
  • 맑음보성군10.1℃
  • 맑음강진군9.9℃
  • 맑음장흥8.6℃
  • 맑음해남9.0℃
  • 맑음고흥8.9℃
  • 맑음의령군11.3℃
  • 맑음함양군8.7℃
  • 맑음광양시12.4℃
  • 맑음진도군8.5℃
  • 맑음봉화6.9℃
  • 맑음영주8.8℃
  • 맑음문경11.8℃
  • 맑음청송군8.6℃
  • 맑음영덕13.4℃
  • 맑음의성8.3℃
  • 맑음구미11.8℃
  • 맑음영천9.2℃
  • 맑음경주시9.3℃
  • 맑음거창10.5℃
  • 맑음합천11.6℃
  • 맑음밀양10.7℃
  • 맑음산청10.6℃
  • 맑음거제10.6℃
  • 맑음남해11.6℃
  • 맑음11.1℃
기상청 제공
나의 출애굽기(20)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의 출애굽기(20)

북한선교현장

나의 출애굽기(20)

 

드보라

 

  

51. 동생의 노력으로 집결소에서 출소하게 되다

 

드디어 그렇게 기다리던 동생이 집결소에 면회를 왔다. 동생은 내가 탈북하기 전에 군대에 갔던지라 이번 만남이 거진 10년 만이었다. 동생은 나를 만나자마자 욕을 한 사발 했다. “당과 수령을 배반하고 부모·형제를 배반했으면 잘 살아야지 이게 무슨 꼴이냐!” “동생아! 미안하다 미안하다

 

나는 동생 볼 면목이 없어서 그저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 모습을 보던 간부는 민망했던지 , 그만 욕해라 안 그래도 불쌍한데 뭐 그리 심하게 대하냐?” 하면서 말리다가 자리를 피했다. 그 사람이 자리를 피하자 동생은 그제야 울면서 ! 누나가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있는 것만 해도 감사하다라고 했다. 간수들에게 혹시 잘못 보일까 봐 반가운 마음을 억누르고 그렇게 욕을 했던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 어떻게 살았는지 이야기를 나눴다. 동생은 결혼하고 가정을 잘 꾸리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나올 수 있겠는지 애써보겠다고 했다. 그 뒤로도 동생은 자주 면회를 왔고 여기저기 돈도 빌려서 나를 위해 뒷공작을 해주었다. 나의 출소를 위한 노력이 결실을 볼 즈음 동생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누나, 내가 꺼내줄 수 있는데 꺼내주면 중국 갈 거지?” ”아냐, 난 안 간다두 번 다시 이런 일 없다.” “약속한 거지? 알았어, 그러면 누나를 꺼내줄게.” 나는 동생을 만난 지 2달 만에 출소할 수 있었다.

 

52. 북한 땅에 정착을 하지 못하고, 다시 탈북을 시도하다.

 

동생과 약속한 대로 어떻게 해서든 북에서 살아보려고 마음을 굳게 먹고 나왔다. 그런데 나와 보니 하루도 못 살 것 같았다. 중국에서는 비록 잘 살지는 못해도 하고 싶은 말은 마음대로 했는데 여기는 말도 맘대로 못하고 통행증 없으면 어디 가지도 못했다. 숨 막히는 답답함이 나를 짓눌러왔다. 이전에는 어떻게 지냈는지 모를 정도로 북한은 말 그대로 감옥 그 자체였다. 온 사방의 감시가 느껴졌다. 숨이 막혔다.

    

나는 언니도 찾고 북에 두고 나갔던 아들딸도 찾아야 했다. 그러나 돈은 1원도 없고 이동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사람을 찾아 중국 가면 돈을 보내겠으니 내 아들딸 좀 찾아주오.” 하고 주소를 쥐여주고 부탁을 했다. 그런데 돌아온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시어머니와 큰아버지 모두 다 죽었고 우리 아이들은 찾지 못했고, 꽃제비가 되었다는 소식만 들었다고 했다. 가슴이 무너지고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북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진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중국에 놓고 온 갓난아이 생각이 간절했다.

 

며칠 이렇게 마음을 잡지 못하다가 결심을 했다. 무작정 강을 건너기로 한 것이다. 그 전에 장마당 가서 쥐약을 사 왔다. 혹시 붙잡히면 다시 감옥생활은 도저히 할 수 없겠다 싶어서 잡히면 먹고 죽을 생각으로 사 온 것이다. 그렇게 각오를 하고 강을 건너러 갔다. 깊은 밤, 손에 쥐약을 쥐고 강가에 서서 할머니에게 배운 대로 문구를 외우고 기도 아닌 기도를 했다.

 

하나님, 건너게 해주시면 죽을 때까지 하나님께 충성하겠습니다.”

   

(한국오픈도어 제공)

편집부 www.gbhana.com

관련기사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